“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000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저는 이처럼 긴 여행과 이 모든 고된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은혜로 건강은 늘 좋았습니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열심인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죄악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산속에서도 오래 살 수는 없습니다. 신자로 사노라면 점차 외교인들한테 알려지게 돼 박해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 최양업 토마스 신부(자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 중) [출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배론’이라는 명칭은 지형이 마치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좁은 입구에 경사가 비스듬히 있어 안쪽 지형이 잘 보이지 않는 특징과 동시에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원주, 충주 등 여러 도시와 연결되어 있는 산길이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천주교는 박해당하던 종교였기에 신자들은 이렇게 요새같은 곳에서 자신들의 신앙촌을 구성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한편 배론성지는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교 정신을 이어온 곳으로써, ‘국내 최초의 신학당’,‘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소’,‘황사영 백서 토굴’등 국내 천주교 역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신앙유산으로 가득합니다. 배론성지의 유명한 단풍절경과 함께 그 당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귀한 목숨을 내어 준 옛 성인들의 숭고한 넋을 생각하며 엄숙한 마음을 담아 성지를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국내 두번째 서품을 받은 천주교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를 박해로 모두 잃고, 자주 도피생활을 해야했지만 신앙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서울로 올라가 열다섯살의 나이에 프랑스 선교사에게 김대건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에서 유학하며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국내로 돌아와 활동하기 위해 중국, 요동 지역에서 사목하며 기회를 엿보았고 결국 13년여 만에 성공해, 하루 100여리, 매년 2,800여km의 산간벽지를 직접 발로 뛰며 성사를 집전하였습니다. 11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목하며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동시에 신분제 폐지 등을 주장하며 사회개혁을 위한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사목활동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하였습니다.
한편, 2016년 4월 26일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대해 교황청 시성성은
‘가경자’로 선포하였습니다. ‘가경자’란 ‘시성(諡聖,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선언하는 행위로 그 선언에 따라 해당 인물은 성인목록에 등재됨과 동시에 즉시 성인으로 인정받아 전 세계 교회에서 공경받음)의 전단계로 ’존엄한 자, 존경스러운 분‘ 이라는 칭호로, 시복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시복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부여되는 명칭입니다.(현재 복자 등재를 위한 기적심사가 교황청 시성성에서 진행 중이라고 하며,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 반열에 오른 것은 아주 드문 일이라고 하니 그 의미가 정말 남다릅니다.)
대역죄와 순교의 아이러니 : 황사영 백서사건
황사영은 1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장래가 촉망되던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의 조카사위로 해당 집안에서 서학을 접하며 공부했습니다. 추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이 동굴에서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위해 주교에게 보낼 편지를 토굴에서 작성합니다. 해당 백서는 현재 바티칸 민속박물관 고문서연구실에 전시되어 있는데, 가로62cm, 세로38cm인 작은 비단조각에 1만 3천자가 넘는 한자를 빼곡하게 오타없이 적어낸 것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박해를 막고 신앙의 자유를 찾기위해 천주교를 포교할 방안을 담은 내용이나, 외세의 군대를 이용해 정부를 뒤집자는 반란적 요소가 들어있어 검문에서 걸리게 되고,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거열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 백서 이후로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더욱 거세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황사영은 순교자이면서도 시복시성이 오랫동안 미뤄졌다가, 2013년 교황청 시성성에서 가경자 전단계인‘하느님의 종’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기도 했습니다.
국내 최초의 신학교 : 성요셉 신학교
천주교 프랑스인 신부들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로, 철학과 신학을 중심으로 서양의 학문과 문물을 가르쳤습니다. 라틴어를 중심으로, 일반상식과 과학지식, 의술,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다뤄, 포교활동 및 초·중·고등 교육을 함께 실시한 근대학교의 역할까지 맡았습니다. 이후 천주교 박해가 심해지며 많은 교직자들이 순교하게 되자 신학생들도 모두 흩어지고 학교는 창립 11년만에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배론성지는 숭고한 희생들이 담긴 천주교의 성지이므로,
그들의 고행을 기리며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조용히 장내를 둘러봐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