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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말동굴 유적은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에 위치한 우리나라(남한) 최초의 구석기 시대 동굴 유적으로, 많은 분들이 교과서에서 먼저 만나보셨을 것 같습니다. 이 밖에도 한수면 사기리 창내유적, 큰길가 유적, 황강리 유적 등 신석기 유적지가 다수 발굴되었고, 청동기 시대의 황석리 고인돌군 등 역사 이전(선사) 시대의 귀중한 자료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아, 예전부터 제천 지역에는 사람들이 넓게 분포하여 거주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세월이 흘러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구석기 시대 인류의 터전이 되었던 제천지역은 삼국시대라는 변수를 맞이, 접경지역으로 변화했는데요. 주변의 철산지와 수운물류 핵심인 남한강 물길 그리고 한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등 각 국가들에게는 제천지역이 상당히 매력적인 곳이었나 봅니다. 그리하여 이 때의 유적들은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관방유적 성향이 짙어, 망월산성, 황석리산성 등 성곽 위주의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삼국시대 제천의 명칭도 지배했던 국가에 따라 각기 달라 격전지였던 점을 느낄 수 있는데요. 고구려 시대에는 내토(奈吐)군, 사열이현, 신라시대에는 내제(奈堤)군 등으로 지칭되었다고 하네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현재 제천시에서도 삼국시대의 향수를 느껴보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고구려 시대의 내토와 신라시대의 내제 명칭은, 현재 제천에서 "내토로", "내제로"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로는 고구려 시대의 사열이현의 사열은 ‘청(靑)’ 즉 찬물과 바람이 솟구치는 곳이 있는 곳이라는 고을명으로, 4계절 축제 중 겨울 축제로 겨울왕국 제천축제를 개최하고 있는 우리 시에 시간을 거스른(?) 찰떡같은 작명이었다는 점입니다. 덧붙여 당시 고구려의 행정명인 ‘내토(奈吐)’ 지명을 통해 큰 제방을 연상할 수 있는 의림지를 유추한다고 하니, 글 없던 선사시대부터 삼한시대,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 제천 속에서 이어지는 흐름이 꽤나 흥미롭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새 고려시대로 접어든 제천의 이름은 ‘제주(堤州)’로 바뀌었고, 의천(義川) 또는 의원(義原)이라 했다 전해집니다. 고려시대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장려하는 시기였던 만큼, 제천에도 불교가 크게 융성했는데요. 바로 각종 절터(사지)가 이를 말해줍니다. 이 시기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 중 하나로 ‘월악산’ 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인데요. 달이 뜨면 영봉에 걸린다 하여 월악산이라는 이름을 갖게된 이 산은, ‘와락산’ 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먼저 첫 번째는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다 ‘와락’ 무산되었다는 설, 두 번째는 고려 태조왕건의 수도 후보지로 개성 송악산과 중원 월형산(월악산)이 경쟁하다, 개성 송악산으로 결정되자 도읍의 꿈이 ‘와락’ 무너져 와락산으로 지칭되었다는 설이 있었다고 하네요. 결과가 어찌 되었건, 한 국가의 수도로 거론될 만큼 월악산이 영험하고 유명한 산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고려시대 중기 이후 중앙정부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나며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와중에, 고려 내부에서는 삼국부흥운동이 일어나는 등 혼란이 가속화되어 갔습니다. 금나라와 고려의 혼란을 틈타 급격히 성장한 몽골은 이후 고려에 수차례 침입하며 국토를 유린했습니다. 당시 무신정권은 수전에 취약한 몽골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강화도 섬에 들어가 방어하였는데요. 결국 이는 한반도 전 내륙지역의 참화를 그대로 방치한 것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중원 내륙의 중심지였던 제천 등지에서는 몽골군에 침입에 맞서 격렬히 저항하며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는데요. 몽골군의 침략은 총 일곱차례로 그 중 후반기인 5~7차 침입 때 이르러 몽골군이 제천지역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특히 6차 침입 때는 몽골군을 피해 주민들이 월악산의 신사로 대피하였고, 이를 잡으러 가던 몽골군에 비바람과 안개, 우레와 우박이 쏟아지자 신령의 조화라 생각한 몽골군이 물러섰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이 후 몽골의 마지막 침입 때 박달재에서 기습하여 물자와 포로를 노획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충주산성이라 적힌 기록은 오늘날의 덕주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여 제천에서 항쟁이 꽤 크게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원간섭기를 거친 고려는 말기에도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고, 역시나 제천, 충주, 단양 근처에서 여러번 싸워 이겼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2000년대 선풍적 인기를 끈 드라마 태조왕건의 세트장이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에 소재하였었는데(현재 한국 환경공단 리조트 연수원 부지입니다), 천년을 넘나드는 고려와 제천의 인연이 꽤나 흥미롭네요.
고려 말의 혼란을 끝내고, 태조 이성계는 서울을 수도로 새 나라 조선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의 기본으로 삼아 불교를 억제하고, 중앙 중심의 왕권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정치, 사회, 문화 등을 유교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한편 제천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따라 유학을 깊게 연구하며 심화시켜 나갔는데요. 그러던 중 조선 현종의 왕비가 청풍 김씨 가문에서 배출되었고, 이에 힘을 얻은 청풍 김씨가 정치적 실세로 등장하며, 황강서원, 봉강서원 두 개의 사액사원을 건립하고 청풍을 도호부로 승격시키는 등 지지기반을 마련함과 동시에 학문적 기반을 공고히 더해나갔습니다.
특히 조선 현종대는 예송논쟁이 활발해지며, 유학의 학문적 심화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학문적 격렬한 대립이 정치에 까지 이어지며 숙종 대 3차에 달하는 환국이 발생하는 가운데, 제천지역은 노론의 이론적 기반을 심화시키며 권상하, 한원진 등 유명 유학자들을 배출하여 노론의 정치, 사상적 기반으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한편 조선후기로 들어서며 사상적 기반이 기존의 학문적인 경향에서 실증적인 경향으로 변화하자 제천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먼저 제천 깊은 산중에 조그만 마을이 자리잡은 것이 바로 그 시작이었는데요. 지금은 ‘배론성지’로 유명해진 배론마을은 조선후기 박해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사는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사위이기도 한 황사영은 신유박해가 발생하자 배론의 산 속 토굴에 몸을 숨기고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천주교 포교방안을 몇가지 제안한 백서를 씁니다. 이후 그는 검문에 발각되며 거열형을 당해 사망하였습니다.(해당 내용은 대부분 선교사를 파견하여 조선의 천주교를 전파하자는 내용이었으나, 이 중 외군 개입으로 목표를 달성하자는 내용이 일부 있어 논란이 있었고, 결국 순교자로 지정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의 백서는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포교활동을 한 점, 글귀가 뛰어난 점 등으로 현재 교황청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편 외세의 등장과 정치, 사회의 혼란 속에서 서학에 맞서 등장한 동학은 농민 중심의 교세를 확장해나갔습니다. 조선 말기에는 청풍에서 농민항쟁이 대단하였는데, 이는 훗날 동학농민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제천민중의 굳건함은 일제침략이 노골적으로 변하자 스스로 의병을 칭하며 그 기세를 떨쳐나갔습니다.
치욕적인 조약 이후 개항이 진행되며 외세들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었습니다. 그 간섭 속에 조선 민중을 향한 관심은 없었기에, 제천 지역의 주민들 역시 곤궁한 삶을 면키 어려웠다고 합니다. 특히나 의병이 분연히 일어났던 제천지역은 무자비한 학살의 중심장이 되었으며(이 때의 영향으로 지금도 제천에는 100년 이상 된 건축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제천 민초들의 항일감정은 더욱 거세져, 이후 중부지방 내륙권 3·1운동 및 독립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국권침탈 후 일제는 군대식 무단통치를 앞세워 민중에 폭압적인 지배를 자행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의병도시였던 제천은 대토벌로 터전이 초토화되며 일제에 대한 반일감정이 더욱 격화되었고, 이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그러던 중 고종황제의 승하소식으로 민중의 감정이 더욱 격해졌고,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하는 이범우가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원주, 단양, 영월 등에 동참을 권하는 한편 제천에서 만세운동을 거의하기에 이르자 장날이 열리는 4월 17일 천여 군중들이 대규모 만세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이처럼 지지치 않는 반일 정신으로 무장한 제천민중은 일제의 지속적인 주목에도 굴하지 않으며 제천공립보통학교 맹휴투쟁, 김정호 등의 제천청년회 활동 등을 지속하며 그 저항정신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갑니다.
한편 일제강점기 제천 지역은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되는 시기였습니다. 단순히 들으면 도로망, 철도망의 발전으로 제천이 철도교통의 요지가 됨에 기여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결국 이는 일제의 효율적인 수탈을 위한 기반 시설이었다는 것이 많은 실제연구를 통해 밝혀지기도 하여 공분을 자아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일례로 의림지 수리를 누리는 좋은 땅을 일본인이 전부 잠식했던 점, 엽연초 전매 및 잡화점 운영 등을 통해 수익을 독점하였던 점, 마지막으로 당시 제천 주민들은 식량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농가가 대부분일 정도로 궁핍을 면하지 못했다는 점 등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니 그 당시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삭막했을까요?
일제의 2차 세계대전 항복으로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또다른 혼란이 찾아온 가운데, 제천지역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시적으로 등장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심하지는 않았던 듯 싶습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강, 고산지대로 방어형 지대를 구축하고 있던 제천은 북한군의 남진속도를 현격히 늦추며 연합군이 낙동강 이남을 지키고 반격의 기초로 활약하는데 큰 공헌을 해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환경이 전쟁 중 월악산에 고립되었던 북한군의 빨치산 잔당 활동으로 이어져 남부 일대가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전쟁 후 제천은 중앙선, 충북선, 태백선이 교차하는 교통도시로 성장하였고, 석탄과 시멘트산업의 호황기로 산업이 급속히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시간도 잠시 석탄, 시멘트 산업의 쇠퇴로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며, 경제산업구조도 크게 재편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제천은 21년 1월 청량리발 56분 고속열차의 운행을 시작으로 새로운 도약점을 마련하기 위해 민관이 손을잡고 함께 노력해 나가고 있습니다.
한편 1980년대 충주댐의 건설로 청풍 인근 5개면 61개 마을이 수몰되었으며, 많은 실향민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내륙의 바다라 불리는 제천의 대표 관광지인 청풍호를 비롯해 수몰마을의 유적, 유물들을 보관하는 청풍문화재단지가 조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제천은 약령시였다는 장점을 활용하여 한방바이오엑스포를 유치, 한방 및 의료관광 휴양관광도시를 표방하며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한편 국제음악영화제 등을 통해 중부권 힐링, 문화, 국위선양 정신 등을 향유·선도 하기위해 노력해 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