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제천 알아보기 > 의리가 으리한 제천 > 으리으리한 문화유산
연세대학교 박물관 동굴탐사단을 이끌던 파른 손보기 교수는 공주 석장리 유적, 제천 점말동굴 유적 등을 발굴하여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분으로, 각지의 다양한 고고학 유적들을 발굴해내며 일제 식민사학(타율성론 등)의 주장을 과학적, 논리적으로 뒤집는 동시에 올바른 우리역사를 알리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신 분입니다. 1964년 국내 최초로 파른선생의 연구팀은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하는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는데요. 선생의 연구팀은 이 이후에도 고대사를 밝혀 식민사관을 저지하고 올바른 사관을 잇고자 계속해서 발굴을 이어갑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파른선생의 연구팀은 약 7여년을 헤맨 끝에 마침내 1973년 6월 10일, 제천에서 고대사 연구가로 활동하던 조석득씨의 제보를 받고 한 동굴에 이르게 됩니다. 유난히 동굴이 많았던 제천의 특수한 상황과 해당 동굴에서 나온 큰 뼈, 뿔 등을 한약방에서 팔았던 흔적 등… 그 당시 연구팀은 제보를 받고 이틀 뒤 바로 동굴로 들어가 각종 뼈 유물을 4천여점 수집하였고, 그 해 11월 3일 점말동굴을 정식으로 발굴하기 시작하여 제천지역, 나아가는 우리 한반도의 수십만년 생활상, 동식물 등을 발굴해 내기에 이릅니다.(파른선생의 업적은 공주 석장리 박물관에서 더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현재 점말동굴은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제천시에서는 점말동굴의 고고학적 의의를 지키는 동시에 2020년부터 주변 환경정비 및 점말동굴 명소화 사업을 실시, 국내 선사시대 대표 유적지로 알려나갈 계획입니다.
호서지방은 충청도를 지칭하는 다른 말로, 호수의 서쪽 지방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호수는, 지금 소개해 드리려는 대한민국 명승 의림지와 제림을 말합니다. 의림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서 고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농경수리시설로 역사, 문화적 그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유적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의림지의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구려에 속했을 당시의 이름이 내토(奈吐)인 점, 제방 축조시기가 800년대로 추정되는 점 등으로 보아 삼한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악성 우륵이 축조했다고 하는 설도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어 설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천10경 중 제1경이기도 한 의림지는 1807년에 건립된 영호정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 1~2백여년의 시간을 의림지와 함께 버텨낸 제림(400여그루의 노송, 버드나무 숲) 등이 빼어난 풍광으로, 악성 우륵선생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우륵대(연자암) 뿐 아니라 진섭헌, 호월정 등 많은 정자와 누각이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오는 바, 예술가, 시인들이 즐겨찾는 격조높은 문화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의림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경수리문화 시설인데요. 삼한시대부터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중요합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의림지는 현재 최고 농경수리문화 저수지의 역할보다는 역사·문화적 유원지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높이 162m의 수경폭포와 250m 길이의 인공동굴, 의림지를 조망할 수 있는 데크로드 및 30m 길이의 자연폭포인 용추폭포에 놓인 유리전망대, 의림지 볼레길과 제2의림지 비룡담 생태숲길까지 다양한 관광자원과 함께 격조높은 문화관광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옥순봉은 비온 뒤의 죽순의 모양처럼 희고 푸른 봉우리가 남한강변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대한민국 명승지입니다. 옥순봉은 제천10경 중 제8경으로 옥순봉 휴게소에서 전망대까지 짧게 5분정도 올라가면 그 수려한 산세와 힘찬 봉우리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옥순봉은 예부터 아름다운 경치로 수많은 유명 화가, 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실례로 퇴계 이황선생이 단양군수로 재직하며 청풍군수에게 옥순봉을 단양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하여, 옥순봉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問 : 단양의 관문)이라고 새긴 일화는 유명합니다. 학문이 깊었던 퇴계선생이셨던 만큼 옥순봉을 그만큼 마음에 들어하셨던 것이겠지요. 또한 단원 김홍도 선생도 청풍의 남한강가를 수없이 거닐며 실경산수 화법으로 「옥순봉도」를 화첩에 담으셨는데요, 수직의 봉우리들이 하늘을 떠받치듯 구성되어 그 신비로움이 배가된 형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호암미술관 소장) 이 밖에도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기묘한 산봉우리들이 조화를 이루어 금강을 방불케하고 산봉우리가 이어진 산형이 절묘할 뿐만 아니라 기복과 굴곡이 자유분방해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라고 극찬하였으며, 이중환 선생은 『택리지』에서 “옥순봉은 수많은 봉우리가 온전히 돌로 되어 우뚝 솟아 있어서 마치 거인이 손을 잡고있는 것 같다”며 이 곳의 뛰어난 경관을 묘사한 바 있습니다.
덕주산성은 지리적 요충지의 관문성 형태로 축조한 대표적인 산성입니다. 한반도의 중심부에서 경상도~충청도~한양을 연결하였던 교통의 요지였던 만큼 독특한 양식(4겹산성)으로 방어요새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월악산 자락의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자연석축 형상으로 전체둘레가 15km에 이르는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덕주산성은 제1성곽(내성) 마애불(상덕주사) 계곡 주변 축성, 제2성곽(중성) 덕주사 동문에서 남북으로 축성, 제3성곽(하성, 차단성) 덕주골 입구 주변 축성, 제4성곽(외곽성) 송계계곡 전체로 이뤄져있으며 각 성곽의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국내 고려~조선시대 성곽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한편, 덕주산성은 4겹산성 특징 뿐 아니라 곳곳에 수원(계곡)을 가지고 있어 천혜의 요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만큼 역사 속에서도 수차례 등장하는데요. 먼저 몽골의 8차 침입으로 충주성이 함락해 인근 주민들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다고 합니다. 몽골군이 그들을 따라와 공격하려 하였으나, 갑자기 하늘에 검은 구름이 끼며 강풍과 천둥, 비와 우박이 수없이 쏟아져, 놀란 몽골군이 “이곳은 신이 보살피는 곳이다” 하며 퇴각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명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명성황후 민씨와 관련있는데요. 흥선대원군과의 정치 다툼에서 패색이 짙자 이곳을 월악궁(이궁)으로 삼아 궁궐을 지으라고 명령, 1894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고 이후 일제가 별궁을 헐어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월악궁지라 하여 한송초등학교 앞에 터만 근근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cf. 명성왕후 김씨 : 제천 청풍 김씨가문에서 배출한 왕비로 조선 현종의 왕비였습니다. 현종임금은 후궁도 들이지 않을 정도로 명성대비(왕후)와 금슬이 좋았다고 합니다.)
남한강가의 망월산(373m) 정상부에 위치한 석성지로, 현재는 제천 문화재단지의 정상을 차지하며 청풍호의 수려한 경관뿐만 아니라 문화적 유산까지 보실 수 있는 유적지입니다. 한강수로를 포함해 조망이 양호했던 망월산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중원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혹시 위의 정답을 맞추신 분?(제천시 척척박사님으로 임명합니다.) 맞습니다. 정답은 ①,②,③번입니다. 순서대로 백제시대, 고구려시대,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망월산성을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이죠. 그만큼 치열했던 경쟁을 방증하는 한편, 삼국의 축성특징이 모두 발견되어 삼국시대 축성방법 연구에 중요한 고증자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륵사는 신라시대 아도화상이 582년에 창건하였고, 그 뒤 원효대사가 고쳐지었으며, 무학대사, 사명대사 등 유명 선사들이 중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절입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폐사가 된 절을 수차례 중수하며 산신각, 요사를 갖춘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규모는 작으나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만큼 독특한 문화재들이 곳곳에 자리하는데요. 먼저 가장 유명한 대한민국 보물인 신륵사 삼층석탑입니다. 신륵사 삼층석탑은 신라말 고려초의 석탑 양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어 그 시대의 석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1981년 해체 복원 때 기단 내부에서 발견된 소형탑 108개와 사리함편 등은 현재 국립청주박문관에 소장되어 공개될 정도라고 하네요. 이 밖에도 조선 중엽에 중수된 신륵사 극락전(충청북도 유형 문화유산)과 화려한 채색이 인상적인 극락전 벽화 및 단청(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등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미상이나,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저명한 사서에서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설화를 짐작할 수 있는 문건이 남아있습니다. 천년 역사의 신라를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 바치자 나라가 망함을 탄식하며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또는 덕지왕자)가 금강산으로 은거하러 가던 도중, 북두칠성이 보이는 명당으로 월악산의 정기가 마치 금강산과 같다하여 이곳에 마애불을 조각하고 덕주사를 창건, 금강산에서 초목근피로 여생을 마감한 망국의 왕자 마의태자를 평생 그리워하며 여생을 보냈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있는 절입니다. 덕주사는 상덕주사, 하덕주사로 불릴 만큼 규모가 큰 절이었고, 조선시대 방략 정책에 “덕주상사를 수리하여 된장과 소금을 많이 예비하는 일을 남한산성의 예와 같이 한다.” 등의 문구로 보아 조선시대까지 승군, 물자, 방어 등에 이르기까지 방략전략 기능을 갖춘 절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후 한국전쟁 때 무장공비의 은신처가 될 수 있다 하여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지속적으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편, 「마의태자 덕주공주」 설화에는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이 빠질 수 없는데요. 마애불은 나말여초 중요 석불 양식을 보여주는 불상으로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우수할 뿐만 아니라 망국의 비애와 오누이의 아름다운 우애 등을 느낄 수 있는 전설이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빛내주는 듯합니다. 마애불에 등장하는 전설로는 경주에서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일행이 월악산에 도달하자 아름다운 풍광에 금강산에 온 것 같다 하여 머물다 마의태자는 미륵불, 덕주공주는 마애불로 변해 일년에 한번 만난다는 설(실제로 마애불은 남향, 미륵불은 불상으로는 독특하게 북향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금강산으로 떠난 마의태자를 그리워하며 덕주공주가 오라비를 떠나보낸 애끓는 심정에 견디다 못해 마애불로 변했다는 전설 등이 있다고 합니다.
장락사지7층모전석탑(보물) :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탑의 형식으로,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아올린 탑으로 벽돌들을 모아 탑의 형식을 모방하여 쌓아올렸다 하여 모전탑이라고 한합니다. 특히 이 탑은 회흑색의 점판암으로 만든 모전탑으로 현재 높이가 9.1m이며, 건립연대는 탑의 형식이나 돌 가공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전체가 7층에 이르는 높은 탑인데 각 층의 줄임 비율이 적당하여 장중한 기풍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의 심한 피해로 무너지기 직전에 있었는데, 1967년 해체 복원하였습니다. 이 때 7층 지붕돌 위에서 꽃모양이 세워진 청동편이 발견되어 탑의 꼭대기를 이루는 상륜부는 청동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모전석탑이 자리했던 장락사지는 제천에서 발견된 최초의 삼국시대 불교유적지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한 차례의 시굴조사와 세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다양한 유물을 출토, 고대 문화 전파경로와 제천지역의 고대 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은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발원한 호국불교적 성격이 강해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또한 사자탑이라는 특수형식의 석탑(이형탑) 양식을 사용한 점, 각 부의 구조와 양식, 조각수법 등에 있어 연대가 확실해 다른 석탑의 건조 연대 추정의 기준작이 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국내 석탑계의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보물입니다.
물태리 석조여래입상은 당당한 어깨, 양감있는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형식을 가짐과 동시에, 비사실적 손, 괴체화된 신체 등으로 고려시대 형식도 가지고 있어 고려시대 제천지역의 불교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라 할 수 있습니다. 물이 귀했던 그 옛날 물이 많은 곳에서 만든 만큼, 두툼하고 후덕하며 자비로운 부처의 풍모를 잘 나타내고 있는 듯합니다. 물태리는 충주댐의 건설로 청풍호에 거의 수몰되었으며 현재는 청풍문화재단지 내 보호각에 모셔져 있습니다.
한벽루는 대한민국 3대 정자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뛰어난 풍광으로, 수몰 전에는 그 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하여,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등 유명 문인들이 편액, 현판을 남겨놓았던 유명한 누각입니다. 고려 후기 객사로 지어진 누각이나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으로 조선시대 자연을 동경하던 선비들의 한시, 그림 등의 주제로 자주 등장하여, 단원 김홍도 등이 다녀가며 수많은 그림을, 유성룡, 권상하, 정약용 등이 한시, 시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문인)들의 시회장소의 대표격인 한벽루에서 좋아하는 시집을 읽어보시는 일도 꽤나 낭만적인 일이겠습니다.
계유년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이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정권을 장악하여(계유정난) 왕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에 반대하며 단종을 향한 충절을 지킨 대표적인 신하들로 단종복위 계획을 도모하다 처형당한 사육신, 그리고 벼슬을 버리고 평생 단종을 추모하며 초야에서 두문불출했던 생육신입니다. 생육신은 사육신처럼 복위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세조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때문에 지방으로 내려가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던 신하들입니다. 원호선생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영월로 쫓아내자 근교의 송학면 장곡리, 지금의 관란정에서 유숙하며 단종의 문후를 드렸습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된 뒤 영월에 묻히자, 단을 세우고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 무덤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전해집니다. 이 후 세조가 호조참의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목숨을 걸고 끝끝내 거절하였습니다. 원호의 사후, 그의 후손과 유학자들이 그의 충의를 기리고자 비석과 정자를 세웠고 옆에 유허비를 세워 그를 추모했습니다. 관란정은 야트막한 야산이지만 그 앞에 보이는 한반도 모양의 지형과 펼쳐진 평창강이 그의 충심과 같이 아름다운 형세입니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 유중교(성리학자 이항로의 제자)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889년에 세운 서당으로, 이후 구한말 제천의병의 창의발상지로 제천의병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데 사상적, 전략적 기반을 만든 교육기관입니다. 유중교는 주희(주자), 송시열, 이항로의 영정을 모시고 정기적으로 이곳에서 참배하였습니다. 이후 유인석을 비롯해 스승의 뜻을 이어가던 선비들은 1895년 단발령에 직면하여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고민하다, 의병을 일으켜 친일 관료들을 처단하며 제천의병의 활동 실마리를 만들었습니다. 추후에 유중교, 유인석, 이소응 등을 추가 배향하였고, 매년 춘향제(음력3월 20일), 추향제(음력 9월 20일)에 제향을 지내고 있습니다. 제천시에서는 자양영당 정비사업을 추진하여 제천의병의 넋을 기리고자, 숭의사를 조성, ‘호좌창의진’ 깃발과 ‘조선말13도의군도총재의암유선생휘하제현신위’를 봉안하고 매년 10월 제천의병제 행사를 통해 고유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배론’이라는 명칭은 지형이 마치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좁은 입구에 경사가 비스듬히 있어 안쪽 지형이 잘 보이지 않는 특징과 동시에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원주, 충주 등 여러 도시와 연결되어 있는 산길이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천주교는 박해당하던 종교였기에 신자들은 이렇게 요새같은 곳에서 자신들의 신앙촌을 구성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한편 배론성지는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교 정신을 이어온 곳으로써, ‘국내 최초의 신학당’,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소’, ‘황사영 백서’ 등 국내 천주교 역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신앙유산으로 가득합니다.
2016년 4월 26일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대해 교황청 시성성은 ‘가경자’를 선포하였습니다. ‘가경자’란 ‘시성(諡聖,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선언하는 행위로 그 선언에 따라 해당 인물은 성인목록에 등재됨과 동시에 즉시 성인으로 인정받아 전 세계 교회에서 공경받음)의 전단계로 ’존엄한 자, 존경스러운 분‘ 이라는 호칭으로, 시복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시복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부여됩니다. (현재 복자 등재를 위한 기적심사가 교황청 시성성에서 진행 중이라고 하며,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 반열에 오른 것은 세계 최초라고 하니 그 의미가 정말 남다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를 박해로 모두 잃고, 자주 도피생활을 해야했지만 신앙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서울로 올라가 열다섯살의 나이에 프랑스 선교사에게 김대건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에서 유학하며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국내로 돌아와 활동하기 위해 중국, 요동 지역에서 사목하며 기회를 엿보았고 결국 13년여 만에 성공해, 하루 100여리, 매년 2,800여km의 산간벽지를 직접 발로 뛰며 성사를 집전하였습니다. 11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목하며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동시에 신분제 폐지 등을 주장하며 사회개혁을 위한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사목활동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하였습니다.
황사영은 1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장래가 촉망되던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의 조카사위로 해당 집안에서 서학을 접하며 공부했습니다. 추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이 동굴에서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위해 주교에게 보낼 편지를 토굴에서 작성합니다. 해당 백서는 현재 바티칸 민속박물관 고문서연구실에 전시되어 있는데, 가로62cm, 세로38cm인 작은 비단조각에 1만 3311자의 한자를 빼곡하게 오타없이 적어낸 것이 신기합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박해를 막고 신앙의 자유를 찾기위해 천주교를 포교할 방안을 담은 내용이나, 외세의 군대를 이용해 정부를 뒤집자는 반란적 요소가 들어있어 검문에서 걸리게 되고,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거열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 백서로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더욱 거세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황사영은 순교자이면서도 시복시성이 오랫동안 미뤄졌다가, 2013년 교황청 시성성에서 가경자 전단계인 ‘하느님의 종’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기도 했습니다.
천주교 프랑스인 신부들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로, 철학과 신학을 중심으로 서양의 학문과 문물을 가르쳤습니다. 라틴어를 중심으로, 일반상식과 과학지식, 의술,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다뤄, 포교활동 및 초·중·고등 교육을 함께 실시한 근대학교의 역할까지 맡았습니다. 이후 천주교 박해가 심해지며 많은 교직자들이 순교하게 되자 신학생들도 모두 흩어지고 학교는 창립 11년만에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제천에는 선사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원권 문화의 대표성을 띄는 많은 유적과 유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유물은 이상하리만큼 발견되지 않는데요. 여기에는 제천 역사의 슬픈 비밀이 있습니다. 유생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3차에 걸친 활발한 의병운동의 중심지로 일제에 눈엣가시였던 제천은 정미의병 이후 일제의 토벌작전으로 시내의 관사조차 모두 잿더미가 되어, 지금까지도 100년 넘는 건물이 없을 정도로 초토화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 소개해드릴 잔재들도 제천의 민생보다는 천혜의 교통망을 이용한 수탈에만 급급했던 일제치하의 어두움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통해 당시 제천의 비극과 지금의 기적같은 발전상황을 간접적으로 느끼실 수 있습니다.
엽연초 수납취급소는 재배한 잎담배를 거두고 숙성시키는 곳으로, 제천지역에 엽연초 수납취급 업무가 증가하자 ‘기역자’형 평면에 근대 목구조로 작업순서에 따라 기능과 효율을 구성하여 배치해 1943년 재건축한 건물입니다. 원형레일, 습도조절장치, 환기구 등 엽연초 시설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고, 건립당시의 목조 트러스 및 볼트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근대기 연엽초 산업의 대표적인 시설물이라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1918년 제천엽연초경작조합의 옛 사옥으로, 아치형 현관, 목조건축 등 근대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일제강점기 근대화 시기의 과도기적 건축양식과 업무시설의 특징이 잘 남아있어 관련 연구에 유용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1년 화강석을 쌓아올려 지은 조적식 구조의 건축물로 한국식 쌓기 방식(완자형)방식을 취하고 있어, 쌓기방식, 지붕 등에서 한국적 느낌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가집니다. 일제의 수탈이 정점을 찍던 1941년 경북~서울 노선의 중간지점인 제천역의 개통과 함께 시작하여 각종 산림, 지하자원을 수탈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일반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