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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매우 측은하게 보였다. 전혀 희망이 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몇몇 군인의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가엾게만 생각했던 나의 생각이 아마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 ... 적어도 그들은 자기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 FA 맥켄지 (영국인, 아시아 특파원)

을미의병(대표인물 : 의암 유인석)

제천은 의병의 처음이요, 마지막인 고장이다. 회당 박정수(의병활동가, 독립운동가)

일제의 내정간섭도 마음에 안드는데, 일제가 명성왕후를 시해하자(을미사변) 제천에서는 의암 유인석 대장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의병운동(을미의병)이 일어납니다. 의암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이필희를 대장, 서상렬을 군사로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제천의병은 이후 비타협 강경노선을 주장하며 뚜렷한 투쟁노선으로 타지의 의진을 흡수하여 그 세를 강화해 나갔으나, 아관파천 이후 친일내각이 힘을 잃고 을미개혁이 중단되자 의병활동은 진정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후 고종황제의 의병 해산 권고조치에 따라 제천의병의 중심이었던 의암 유인석 선생은 의병을 해체하게 되며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 황해도 및 평안도에서 후학을 양성하다 정미조약 이후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상설, 이범윤 등과 함께 항일투쟁의 중심이 되어 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경술국치 이후 반대운동을 개진하던 선생은 러시아의 탄압을 피해 서간도로 재망명하였으며 74세의 일기로 병사하셨습니다.

을사의병(대표인물 : 의당 박세화)

“도가 망했는데 내 어찌해야 하는가 / 하늘을 우러러보고 한바탕 크게 통곡하노라 / 
				자정하여 성현께 내 몸을 바치니 / 오호라 그대는 미혹되지 말지어다.” 
				- 절명시, 의당 박세화(문인, 독립운동가)

“러일전쟁 직후에 임자없는 섬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 라는 노랫말의 가사를 아시나요? 여기서 러일전쟁 직후 임자없는 섬이라고 우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외교권 박탈 조약이었던 을사조약(늑약)이 있습니다. 역시나 러일전쟁 이후 조선의 지배권을 강제로 확보한 일제는 야욕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내정간섭을 시작했는데요. 역시나 가장 먼저 분연히 일어났던 것이 제천, 원주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내륙지방의 의진이었습니다. 의암 유인석선생의 의병진에서 활약한 의병대들이 앞다투어 의병을 일으켰으나, 그 전 격렬했던 의병활동을 기억한 일제의 방해 속에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을미의병 때 반일감정이 있었으나 참여하지 않았던 수많은 유생들과 지사들이 거사를 일으킨 시발점이 제천의병이었다는 사실은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을사의병으로 활약한 의당 박세화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기 전,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일제의 만행에 비분강개하여 주자 영정을 모시고 덕산면 억수리 불억이 계곡으로 들어와 후학을 양성한 학자인데요. 이 때 9개의 선경에 주자의 무이구곡시 중에 4자씩을 취하여 나라의 안녕과 무운을 빌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이 제천 10경중 하나인 용하구곡으로 일부 보존되어 남아있습니다. 이후 선생은 을사조약 후 남현에서 의병을 일으켰고(거의), 청풍에서 교전하는 중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이후 칩거하던 선생은 일제가 강제로 국권을 빼앗자(경술국치) 절식하셨고, 단식 23일만에 순국하셨습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정미의병(인물 : 운강 이강년)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이른 가을 더운 날이었다. 
			눈부신 햇빛이 시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나부끼는 일장기를 쪼이고일본군 보초의 총검을 비추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산더미 같은 재 위를 걸었다. 나는 일찍이 이렇게 철저한 파괴를 본 적이 없었다. 
			1개월 전까지는 번잡하고 유복했던 촌락이 지금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기와조각과
			회색의 잿더미, 타다 남은 찌꺼기 더미만 줄지어 있다. 온전한 벽도, 한 개의 대들보도, 파손되지 않은 옹기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재를 파헤치면서 무언가 쓸 만한 것을 찾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제천은 지도위에서 사라져버렸다. … 나는 눈앞에 마을이 순차적으로 잿더미화 된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이 완전하게 파괴되었다. 단 하나의 집이나 벽도 남아있지 않았다.” 
			- F.A 맥켄지(영국인, 아시아특파원)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자행되며 외교권이 박탈되자,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이를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일제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전부 장악하였고, 나아가 군대까지 해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해산 군인들이 의병으로 가세하자 의병활동이 본격적인 항일의병전쟁 양상을 띄게 되며 이시기 활약한 의병을 정미의병이라 부릅니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의병과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여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삼고자 하는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국내 마지막 결전이었습니다. 국내 의병사에 한 획을 그었던 제천의병도 정미의병 당시 분연히 일어나 이강년, 민긍호 등이 이끌어 연합하였던 의병연합군이 제천 천남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그 명성을 떨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남전투의 승리를 만끽하기도 전에, 일제는 천남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제천 일대를 초토화시켜 버립니다.(이 때의 영향으로 제천에는 지금도 100년 이상된 건축물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렇듯 제천은 정미의병 당시 연합의병과 일제가 가장 격렬하게 충돌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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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